뇌가 만든 착각, <뇌는 어떻게 세상을 보는가>가 던지는 5가지 충격적 질문

뇌가 세상을 보는 방식부터 다시 묻다
철학이 수백 년간 붙잡고 있던 질문에, 뇌 과학이 다른 방식으로 답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라마찬드란의 강연으로도 유명한 이 책은 그 가능성을 계속 실험합니다. 인도 출신의 신경과학자인 저자는 실험실의 정교한 장비보다, 환자 한 명 한 명의 특이한 증상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이 기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이 책 곳곳에서 보여줍니다.
인간의 뇌 정복은 외부세계나 우주 혹은 생물학이나 물리학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한 문제이다.
우주의 끝이나 물질의 최소 단위를 탐구하는 것 못지않게, 정작 그 모든 탐구를 수행하는 뇌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이 문장은 짚어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통념도 이 기관은 가차없이 뒤집습니다.
일반적인 오류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눈 안에 어떤 이미지가 있다는 가정이다.
눈은 카메라처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찍어 전달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실제로 보는 행위의 대부분은 눈이 아니라 이 기관에서 일어나며, 그것은 망막이 보내는 불완전한 신호를 끊임없이 추측하고 보완해서 우리가 ‘본다’고 느끼는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냅니다. 착시 현상이 그토록 다양하게 존재하는 이유도, 결국 이 기관이 눈이 보내는 신호를 그대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나름의 추론을 거쳐 재구성하기 때문입니다.
뇌는 ‘나’라는 감각도 쉽게 흔든다
책은 환상통, 무시증후군 같은 신경학적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나’라고 믿는 감각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얼굴 피부에서 나오는 감각은 인접한, 잃어버린 손에 상응하는 빈 영역을 침공한다.
만성통증은 반사적으로 팔을 마비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절단 수술로 팔을 잃은 환자의 머리에서, 원래 손을 담당하던 영역이 텅 비지 않고 인접한 얼굴 담당 영역에 슬그머니 잠식당한다는 발견은 그것이 얼마나 유연하고 동시에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를 보여줍니다. 몸의 경계가 사라져도 머리 속 지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만졌을 뿐인데 ‘없는 손’이 만져지는 감각을 느끼는 환자들의 사례는, ‘나의 몸’이라는 감각조차 이 기관이 매 순간 편집해서 만들어내는 임시적인 지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뇌가 지어낸 손, 환상통과 거울 상자
이 책을 신경과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하게 만든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환상사지(phantom limb)’와 거울 상자(mirror box) 치료법입니다. 팔이나 다리를 잃은 환자 중 상당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그 부위에서 극심한 통증을 계속 느낍니다. 뇌의 지도 위에서는 여전히 그 팔이 ‘있는 것’으로 남아 있고, 심지어 주먹을 꽉 쥔 채 굳어버린 것처럼 느껴져 풀어줄 방법이 없어 괴로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자는 거울을 이용해 남아 있는 반대쪽 팔의 모습을 마치 잃어버린 팔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눈에 비춰주는 간단한 장치만으로, 이 기관이 ‘이제 그 손이 움직였다’고 스스로를 속이게 만들어 통증을 완화시키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값비싼 약물이나 수술 없이, 그것이 시각 정보를 얼마나 강력하게 신뢰하는지를 이용한 이 발상은 지금까지도 재활 치료 현장에서 널리 응용되고 있습니다.
뇌졸중 이후 마비된 팔다리의 재활 훈련에도 비슷한 원리의 거울 치료가 쓰이는데, 이는 뇌가 실제 감각 신호보다 시각적으로 그럴듯한 정보를 더 우선시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역으로 활용한 사례입니다. 복잡한 장비 없이 거울 하나로 이 기관을 설득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이 책이 신경과학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뇌가 서로 다른 감각을 뒤섞을 때, 공감각과 예술
책에서 다루는 또 다른 흥미로운 현상이 공감각(synesthesia)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숫자를 볼 때마다 특정한 색이 함께 떠오르거나, 소리를 들을 때 특정한 맛이나 촉감을 함께 느낍니다. 서로 다른 감각 영역이 뇌 속에서 예상보다 훨씬 가깝게 배선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설명되는데, 흥미롭게도 이런 공감각 경향은 예술가들에게서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언뜻 관련 없어 보이는 두 감각이나 개념을 자연스럽게 연결 짓는 능력, 즉 은유적 사고와 공감각이 같은 차원에서 비슷한 배선을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을 책은 제시합니다.
뇌의 전역에서 그 유전자가 발현된다면 뇌 전역에 훨씬 더 과도한 연결성을 지니게 되고, 결국 그 사람은 겉보기에 아무 관련성이 없는 것을 연결시키는 능력인 은유적 경향을 더욱 더 띠게 될 것이다.
공감각을 연구하던 이전 책에서 읽었던 ‘편집’이라는 개념이 이 대목에서 다시 떠올랐습니다. 결국 은유를 만들어내는 능력, 편집자가 서로 다른 재료 사이의 거리를 감각하는 능력도 이렇게 신경 연결 방식이라는 물리적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술적 영감이라는 것이 순전히 신비로운 재능이 아니라, 특정한 신경 연결 패턴의 산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을 한층 더 넓혀줍니다. 공감각이 훈련으로 개발될 수 있는 능력인지, 아니면 타고나는 것인지는 이 책만으로는 완전히 답을 얻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은유적으로 사고하는 훈련 자체는 누구나 의식적으로 연습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뇌의 활동이 자유의지보다 먼저 온다
가장 낯설게 다가온 부분은 자유의지에 대한 지점이었습니다.
뇌의 활동이 1초 먼저 일어나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뇌 활동의 원인일 수 없다.
내가 ‘결정했다’고 느끼는 순간보다 그 활동이 먼저 일어난다는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흔히 우리는 ‘내가 먼저 결심하고, 그 결심에 따라 뇌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실험 결과는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이 기관이 이미 어떤 행동을 준비하기 시작한 뒤에야 ‘내가 결정했다’는 느낌이 뒤늦게 따라붙는다는 것입니다. 책은 이 발견이 ‘정신의학은 결국 신경학의 한 분야로 흡수될 것’이라는 저자의 전망과도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곧 정신의학은 신경학의 한 분야로 흡수될 것이다.
마음의 문제로만 여겨지던 것들이 결국 뇌라는 물리적 기관의 문제로 설명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이 예측은, 정신과 물질을 나누어온 오래된 이분법 자체를 흔듭니다. 우울이나 불안 같은 감정을 ‘의지의 문제’로만 여기던 시선에서, 특정 신경 회로가 관여하는 현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옮겨가는 흐름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뇌 속에서 찾는 정신과 물질의 접점
책은 정신과 물질, 퀄리아와 자아 같은 오래된 철학적 이분법도 신경과학의 언어로 다시 풀어냅니다.
정신과 물질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뫼비우스의 띠의 두면과 같다.
퀄리아와 자아는 한쪽 면이 없으면 다른 한쪽 면도 가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최초 설명으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만든다.
뫼비우스의 띠는 종이 한 장을 반 바퀴 비틀어 이어 붙인 도형으로, 겉면과 안면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로 이어진 표면입니다. 정신과 물질도 겉보기에는 완전히 다른 두 세계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뇌라는 하나의 표면 위에서 관찰하는 방향만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덮으며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내 생각’, ‘내 느낌’이라 믿는 것들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사실은 그것이 만들어낸 해석에 불과할까요. 나 자신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보고 있었다면, 이 책은 그 확신에 균열을 냅니다.
결국 우리가 찾으려는 해답은 뇌 속에 있을 뿐이다.
내가 왜 이렇게 느끼고, 왜 이런 판단을 내리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면, 이 책이 그 질문에 신경과학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답해줄 겁니다. 이 기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조금 더 겸손하게, 조금 더 정확하게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뇌가 만든 ‘나’, 고립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고립된 나’라는 감각 자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현대 과학이 이렇게 발전했음에도 여전히 뇌는 비밀이 많은 기관입니다. 우리의 본능과 본성이 무엇으로 결정되는지조차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데, 하물며 ‘혼자 존재하는 나’라는 감각은 얼마나 정교하게 지어낸 허상일 수 있을까요. 이 기관이 잃어버린 손의 감각마저 인접 영역에서 빌려와 채워 넣는다는 걸 알고 나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받으려는 인간의 습성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혼자만의 고립된 인식은 언제든 오류를 일으킬 수 있고, 그렇기에 인간의 사회성은 그 오류를 서로 교정해주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뇌는 모든 것을 올바르게 연결시킨다.
책은 이 문장으로 뇌의 놀라운 통합 능력을 요약하지만, 동시에 그 통합이 항상 ‘진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역설도 함께 남깁니다. 그것이 그럴듯하게 연결해낸 이야기가 반드시 사실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확신하는 것들, 예를 들어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기 인식조차 얼마간은 머리가 편의상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내 생각에 반론을 제기했을 때 즉각 방어적으로 반응하기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태도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스스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기관이라는 걸 알고 나면, 확신 자체를 조금은 가볍게 붙잡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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